아내의 빈방

캣테일 2019. 9. 9. 13:37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이 천근만근일 때가 있다. 방으로 들어오는 아침 빛도 차단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잠옷에 카디건만 걸쳐 입고는 주방으로 나간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육수를 해동할까도 생각했지만 뭔가를 끓이고 데우고 하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번거로워 다시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게 되는 게으름이 극에 달하는 날이 자주 있다. 뻑뻑한 호밀빵을 오븐에 넣고 치즈 스프레드를 발라주면 남편은 물어뜯듯 억지로 허기를 채운다. 젊었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말로 밥투정을 한 적은 없는 사람이다. 입에 맞지 않으면 몇 숟가락을 먹다가 조용히 물로 입을 헹구고 나가버리긴 해도 대놓고 음식으로 무안을 주지는 않는다. 따끈한 국이 먹고 싶은 날인데 하필 떠먹을 국물이 없으면 라면 없나?라고 묻긴 하지만. 그렇게 성의 없는 밥상을 받아먹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미안하고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나는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이런 생각도 한다. 저 사람은 내가 없으면 어떤 아침을 먹게 될까. 내 빈자리가 얼마나 클까. 홀아비의 궁색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잘 살 사람이지. 하는 생각으로 흘러가면 슬쩍 서운하다가 차라리 그게 낫지 궁상스러우면 그건 또 어떡할까 싶기도 하다. 내가 차지하던 자리가 비워졌을 때 남은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줄까. 내가 없어져 속이 후련하면 어떡하나.

사람의 존재감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치가 결정된다. 책을 밥보다 좋아하던 여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읽은 책의 내용을 자기 삶에 끌어당겨 살다가 떠난 여자. 죽기 직전까지 가치 있는 꿈을 꾸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뜨거움보다는 따뜻했던 사람으로 강함과 연약함이 딱 맞는 곳에서 딱 맞게 발휘되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나는 바란다. 이 모든 생각들이 그저 한낱 욕심으로 허망하게 막을 내리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녀가 떠난 빈 방에서 존 버거는 아내를 추억하고 엄마가 떠난 빈방에서 아들은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존 버거는 베토벤의 론도를 들을 때마다 아내를 생각한다. 아내가 떠난 빈방에서 아내를 위한 비가를 쓰고 있다. 책의 여백엔 화가인 아들이 엄마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그리움이 또 있을까. 존 버거가 쓴 모든 글들을 가장 먼저 읽었던 아내가 있었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본능이 되어버린 지금 여전히 한 줄의 글을 쓰고도 아내의 반응을 기다리게 되는 작가. 책은 고작 35페이지가 전부지만 350페이지 분량의 그리움과 추억이 녹여진 책이다.

당신은 4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들어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 작품 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9분 남짓한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p10

이젠 엄마가 늘 해주신 대로 내가 막 쓴 것들을 타자기로 쳐 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우리가 엄마를 위해 그 일을 할게요.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