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하는 날

캣테일 2019. 8. 23. 11:16

 

 

 

남편이 일찍 퇴근한다는 전화를 받고 사두었던 염색약을 꺼냈다. 흰머리 올라오는 속도가 이젠 제법 빨라져서 그 속도에 맞춰 미용실에 가려면 꽤나 바쁘다.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매만지거나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책을 읽으려고 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그 시간이 참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달리 사람이 많은 날만 골라서 가는지 언제나 대기자가 많다. 하기야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르고 다듬어야 사람 꼴이 되니 너 나 할 것 없이 때가 되면 꼼짝없이 거울 앞에 앉는다. 뿌리 염색은 집에서나 미용실에서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더 시간을 끌면 일이 커지기 때문에 제때에 해결해야 한다. 그때가 바로 오늘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나의 흰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 오늘도 내가 꺼내 놓은 염색약을 보더니 외출복을 부리나케 갈아입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베란다에 의자를 가져다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염색약 상자에 같이 들어있는 장갑을 끼고는 순식간에 약을 섞었다. 섞는 몸짓이 얼핏 보면 리드미컬하기까지. 이러니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약을 바르는 솜씨는 얼마나 좋은지 귀에도 이마에도 지저분하게 여분의 약을 묻히지도 않고 깔끔하게 염색을 끝내고는 시계를 보더니 6시 30분에 샤워하면 돼! 한다. 재빠르게 읽던 책을 가져다 무릎 위에 탁 올려주더니 어느새 물을 끓이고 홍차 티백이 든 머그잔을 건네준다. 그리고는 티백이 들어있던 겉 봉지를 눈앞에 내민다. 잉글리시 애프터눈이라고 쓰여있다. 아마도 지금 시간엔 이 홍차를 마셔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차 서랍을 뒤적거리는 수고를 했던 모양이다. 손끝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라서 홍차 한 잔을 끓여 내오는데도 우당탕탕 요란하지만 마누라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아주니 고맙다. 사람의 마음이 녹는 때는 언제나 별거 아닌 짧고 무심한 찰나이고 아주 사소한 행동을 할 때다. 남편이 나를 내가 남편을 아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을까. 지금도 전부 다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안 하고 좋아하는 일은 해줄 수 있게 됐다. 우리 부부가 적당히 양보도 하고 이해도 하면서 살기 시작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고집이 둘 다 만만치 않아서 힘겨루기도 지겹게 오래 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지인이 니들 정말 둘이 똑같다. 똑같아! 하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이젠 한 사람이 핏대를 올리겠다 싶으면 다른 한 사람은 꼬리는 슬쩍 내려주기도 하고 이것만은 양보 못한다 싶은 일이 생겨도 으이그~ 인간아~ 하면서 모른 체해준다. 모든 부부들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툭하면 감정이 상하던 우리 부부는 이 평화가 새삼스럽게 감사하다. 우리에게 뒤늦게 찾아온 이 평온함은 다름 아닌 나이가 주는 선물이다. 펄펄 끓는 뜨거움을 식히고 따뜻한 온기만 남은 나이가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고양이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내 뒤에 남편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