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구원
내 필사 노트가 빽빽하게 채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정확하게 <다정한 구원>의 32페이지부터였다. 작가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 어딘가 모르게 꼼꼼하고 예민한 듯한 문장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이번엔 전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위태로움이 있었다. 그 아슬아슬함은 아마도 중요한 어떤 것을 상실하고 난 뒤 슬픔에서 자신을 건져올리기 위해 출발한 여행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2년을 간격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그녀를 따라다녀도 좋겠구나 생각했지만 얼마 안 가 우울이 밀려왔다. 유년의 기억이 리스본에 있는 작가. 유년의 기억이 격변하는 한국 그것도 서울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나. 시작부터 완전히 다른 출발이다. 한국의 유명한 작가로 성장한 한 사람이 부모님과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는 다정한 도시가 리스본이라면 내 인생의 출발지였던 마포구 대흥동은 30년이 흐른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어서 당시 살았던 집은 고사하고 반나절은 그곳에서 미아로 길을 잃었었다. 부럽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그녀의 유년 시절이. 오래된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기 위해 떠났던 곳이 대서양이 맞닿아있는 도시 리스본이라니.
임경선 작가는 나의 이런 마음을 짐작했을까. 책을 읽으며 부러움을 느낄 독자들을 위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오히려 나야말로 소설 위대한 캣츠비의 첫 문장을 마음에 항상 새겨두기로 결심한다. "'누구를 비난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 할 것을. 나는 항상 내가 거쳐온 길이 복잡하다고만 생각해왔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아무리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분명히 감사해야 마땅할 특수한 환경이다. 특히나 리스본에서 보낸 1년 동안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은 말이다. 첫 그을림, 첫 유럽, 첫 다인종 친구들, 그리고 처음 느끼는 자유와 본능의 감각, 그 모든 것들이. p187
작가가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부러움과 질투 같은 감정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래 누구나 그렇지. 누군가가 보았을 때 나도 부러움의 조건 하나쯤은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나 임경선 작가의 글에선 나에게는 없는 특유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적어도 어린 시절만큼은 밝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땅에서 살았던 사람 같다.
그녀를 따라 본격적으로 리스본을 둘러본다.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앞서가는 작가의 뒤를 가만히 따라가는 방식은 퍽 내 마음에 들었다. 고유의 이야기들을 간직한 카페와 서점을 차례로 들른다. 1840년에 물은 연 페린서점. 그곳에서 20년을 근무한 직원의 이름이 마팔다 살레마 라는 것을 임경선 작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알아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리스본에 있다는 것도 나는 알지 못했다. 빵이라는 단어의 원산지인 만큼 리스본에선 빵도 먹어봐야 하고 오래된 서점 두 군데도 가봐야 한다. 여행 계획은 꼭 주말을 끼워 넣어야 한다. 주말에만 특별히 열리는 시장이 있다고 했다. 관광객들의 손이 덜 탄 오래된 골목도 가보고 칼사다 포루투게사 라고 불리는 돌길에 단단히 두발을 붙여보고 싶다. 그 돌길을 걷기 전에 노란색 28번 트램도 타야 한다. 소매치기를 만날 수도 있다니 단단히 채비도 하고 또 임경선 작가가 좋아한다는 부겐빌레아 꽃도 찾아봐야 할 텐데.
리스본은 슬픔을 달래주는 도시였다. 슬픔을 덜고 싶을 때는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곳에서 그보다 더 천천히 섬세한 시선으로 한 도시를 응시하다 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리스본 같은 도시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겠다. 다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곳. 꼭 유럽이 아니라도 좋다. 제주도엔 그런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은 종달리가 있고 강원도 고성 바닷가도 좋겠다. 오랜 시간을 통째로 비우기 어렵다면 이틀쯤이라도 충분하다고 마음을 달래본다. 여기까지 적어놓았지만 리스본으로 향하는 마음은 쉽게 접히지 않는다. 리스본으로 가는 비행기값은 도대체 얼마나 할까. 외국으로 떠나는 먼 여행을 꺼리는 편인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때문에 리스본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으니 지금부터 천천히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책 속에서의 상상 여행에서 현실의 여행으로 옮겨가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다정한 구원>은 책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 이곳에서 망자들은 다른 도시에서 보다 과감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존 버거의 말은 리스본 여행을 상상할 때마다 함께 떠올려질 대표 문장으로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