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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여행하다

by 캣테일 2019. 8. 1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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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쁘지 않은 요즘은 우주 공간에 있는것 처럼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간다.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여행도 가고 낮잠도 자고 거리를 핑계로 만나지 못한 친구도 찾아가리라 벼르지만 순식간에 찾아온 여유시간은 덩어리째 뭉텅뭉텅 흘러가 버리고 만다. 외출을 나가면 잘게 다진 채소와 햄을 넣고 볶음밥을 만들어 가장 마음에 드는 접시에 담아서 먹기 전 사진으로 담아 보여줄만큼 성장해버린 딸이 있으니 밥때가 되었다고 종종거리며 집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자식 둘은 꿈도 꾸지 못헸디.아쉬운 마음이 아예 없는건 아니지만 지금와서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 이 단출함을 즐기고 있다. 아직 고3 수험생 아들를 두고 있는 친구 h는 통화를 할때마다 매번 부러워한다. 이젠 체력이 딸려서 고3 엄마 노릇도 버겁다며 투정이 늘어진다. 사실 밥 때만 잘 지킨다고 집안 일이끝나는 건 아니다. 매일 나오는 수건이며 양말 빨래도 주부를 바쁘게 하는 것 중 하나이고 식탁을 조금이라도 쉽게 차리려면 일주일마다 다른 밑반찬도 준비해둬야 한다.

세 식구가 사는 작은 집에 머리카락은 왜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는지 하루를 거르면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다녀야 할 정도다. 비록 세탁기와 청소기가 없이는 안되는 살림이지만 전후처리 과정도 꽤 시간이 소요되는일이다.

주말은 주말대로 또 바쁘다. 주말이어서 일을 더 찾아서 하게되고 모처럼 쉬는 남편과 아이는 주말 특식을 기대한다. 가족들의 기대에 부흥하려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가 된다. 지치는 기분이 드는 건 이 모든일이 당연하게 내 차지인 것이고 한눈이라도 잠시 팔게되면 드문드문 이가 빠진 톱니바퀴처럼 일상이 삐걱거린다는 사실이다. 

외출을 했다가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보인다는 최면을 걸어보라는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눈을 감아도 보지만 곧 다시 눈을 떠야 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에 달라지는 건 없다. 눈을 감았던 시간은 밀려 있는 집안일과 정비례한다. 그게 겁이나 눈앞에 있는 일을 모른체하는 요령을 피울 수가 없다. 안간힘을 다하다 내 풀에 지치는 날이 삼사일 정도 지속되면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른지 저녁밥을 먹으면서 남편이 묻는다.무슨 일 있어? 남편의 단순한 이 질문은 나에게 직무유기를 탓하는 것으로 들렸다. 무슨 대단한 일이있기에 집안꼴이 평소와 같지 않냐는 타박인가? 개인에게 닥치는 힘든 일들은 뭐든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복수하듯 눈을 흘겨봐도 억울한 마음은 여전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어딘가에서 올라오는 의문부호들. 행복을 향한 갈망을 해결할 때가 온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행복을 찾는 과정의 출발에서부터 비장했다. 주어진 조건안에서 찾아야 하는일, 하지만 내 조건은 열악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좌절하게 만든 조건은 내가 오롯이 나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금전의 한계였다.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문제라고. 여행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금전 세가지 모두가 무리였다. 떠나는 일은 행복을 주겠지만 돌아오기 싫은 마음을 여행지에 두고 끝내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도 재미없다. 혼자 다니는 자유로운 여행을 원하지만 자주 남편과 동행해야 할 것이고 남편은 어쩔수 없이 내 여행의 방해꾼이 될것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내 안의 지적 허영을 채워줄 무언가. 흔들리는 순간순간에 나를 잠재워 줄 문장들. 나보다 먼저 간 이들의 인생과 깨달음의 말들, 삶의 그림자에 갇혀 밝은빛을 보지못햇던 내 영혼에 위로가 되는 단어들. 그것들은 다행히도 모두 책속에 있다. 책속에서는 100일동안 세계 여기저기를 정처없이 다녀도 집에 돌아올 걱정은 없다. 동서양의 문화와 인종이 절묘하게 혼합된 터키의 파묵칼레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잘생긴 이국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가슴이 벌렁거리는 상상을 하고 오래전 봤던 영화 속 배경 핀란드의 설경속을 드라이브 하다가 뾰족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만나면 해가 질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봐도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다. 오십의 나이에도 여전히 불확실한 것들. 나는 책에서 답을 구한다.

나의 주방은 북카페가 되고 식탁은 책상이 된다. 밥을 먹어야 할땐 부리나케 책갈피를 끼우고 책장을 덮어 구석진 곳에 밀어 놓아야 하지만 혼자있는시간이면 어김없이 책을 보물처럼 쓰다듬는다. 꽈리고추의 꼭지를 따면서 은유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다. 읽었던 문장을 반복해서도 읽는다. 문장들은 나에게 계속 읽으라고 하고 글로써 말을 하라고 시킨다.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내 삶이 진짜 나의 삶이 된다고, 50을 넘기고 이제야 답을 찾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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